저는 부끄러움이 많은 관심 종자입니다. 이 책의 감상을 나누고 싶지만, 거절이 무서워 글이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구분선 아래로, 문장과 감상의 형식이 전개 됩니다. 읽은 날, 내용은 추가될 것입니다. 언젠가 이 내용을 함께 논의 할 수 있기를 소원해 봅니다.
2022년 스터디 카페에서 시작하며
문득 취리히에서의 내 생활이 떠올랐다. 내가 심취했던 유년시절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었으며, 나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나와, 계속 굴러가며 점점 더 멀어져가는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만 것이었다. 나는 나의 미래를 잃지 않기 위해 그 장소에서 억지로 몸을 돌려야만 했다. 47p
위 문장이 나를 원인 모르게 자극했다. 나는 과거를 기억하며 괴로워하는 편이다. 그래서 위안을 받은 것인지, ‘과거에 대한 회상’ 자체가 나에게 불안과 우울감을 불러온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그가 표현한 마지막 문장이 인상 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선 행동을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할지 못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 숙고해보는 것이다. 52p
위 문장을 내식대로 정리하면, 위 문장은 “전통을 거치지 않고도 개인의 마음속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영혼의 고태적 구성요소가 있다” 라는 것을 확신한 일에 대한 저자의 감상이다. 저자는 자신의 앞마당에 ‘아트마빅투(생명의 숨결)’이라는 이름의 작품을 통해, 모든 상징들이 ‘키스타’속에 감춰진 ‘카바르(kabir)’라고 말한다.
나는 다른 모든 것을 떠나, 저 문장 자체가 마음에 든다. 물론 위 표현이 남용되는 것은 잘못이겠으나, 지금 나에게 있어 필요한 자세이기에 기록해본다.
‘다른 누구 탓도 아니다. 나 자신이 가증스러운 탈영병이었다!’ 67p
나는 어릴적 눈이 돌아갔다고 연기한 적이 있다. 정확이 어떤 일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고, 연기를 통해서 상황을 모면하지 못했다. 주변인들의 관심을 받았고, 그러한 관심이 마냥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나의 수치의 역사는 저자처럼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친구가 가출 했을때 경찰에게 허위로 봤다고 말한 일 (무사히 발견됨), 발야구 도중 거짓말을 한 일, 싸움을 잘한다고 허풍친일, 도와준 친구에게 오히려 악담을 퍼부은 일 등 수많은 기억들이 있다. 수치심으로 부터 도망치며, 허영을 둘러 행위의 목적을 감추었다. 감추는 대상은 비단 타인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해당했다. 나는 나를 모른채 해왔다. 위 글까지 소개 되는 저자의 회상이 나에게 묵직하게 다가왔다.
마침내 나는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어떻든 지금은 작은 학생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의 처벌을 받아 마땅하고 그의 나이에 맞게 예절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시실 들이었다. 나의 다른 측면은 의미가 없음이 틀림없었다. 72p
나는 정확히 1년 하고 2개월 전, 내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최대한 나를 인정하고, ‘다른 측면의 나’의 오만함을 타이르며 살고 있다. 위 문장을 읽으면서, 깨달은 순간의 활홀함을 다시 경험했다. 그와 동시에 이 순간에도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불안감이 들었다. 글을 읽으면서 저자는 이러한 인식 이후 ‘나’를 ‘다른 사람’으로 인식했는지, ‘다른 측면’으로 인식했는지, 그렇게 인지했다면 어떻게 살아가는지 엿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